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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 | 160 | 다만 이 완벽함의 이면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연합군 측의 것으로, 란츠의 상황실은 이 두 달간의 참패를 데이터로 삼켰다. 뤼첸스의 항적과 습격 지점, 보급 추정 해역이 전부 지도 위에 복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이 도출되었다. 대양에 떠 있는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송신의 습관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 측의 것이었다. 작전의 완벽한 성공은 해군 수뇌부의 신중론을 침묵시켰고, "고속전함 전대는 랜드 내해에서 무적"이라는 확신이 [[에리히 레더]]로 하여금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의 조기 투입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함대사령관에는 당연하다는 듯 뤼첸스가 재지명되었다. 회고에 따르면 뤼첸스는 출격 전 지인에게 "같은 주사위를 두 번 던져 두 번 이기는 도박사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두 번째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 1941년 5월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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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 | 161 | ===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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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 | [[1941년]] [[5월 18일]], 뤼첸스의 함대가 두 번째 출격에 나섰다. 편성은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 1척과 신형 중순양함 1척. 원안은 수리 중인 고속전함 2척까지 합류한 4척 편대였으나, [[에리히 레더]]는 수리 완료를 기다리자는 뤼첸스의 건의를 기각하고 조기 출격을 명령했다. 여름이 오면 백야로 북방 돌파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독일 해군은 사상 최강의 전함을, 사상 최소의 호위와 함께 내보낸 셈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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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 | 이번에는 연합군이 먼저 알았다. 중립국 주재 무관의 첩보와 항공 정찰이 노르웨이 피오르에 정박한 대형함 2척을 포착했고, 란츠의 상황실은 지난겨울 복기해 둔 뤼첸스의 항적 위에 예상 돌파로 세 개를 그려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는 가용 전력을 쪼개 세 길목에 모두 배치했는데, 가장 유력한 북쪽 길목에 배정된 것이 함대 기함인 순양전함 1척과 신예 전함 1척이었다. 기함은 20년간 루이나 해군의 얼굴이자 국력의 상징으로 세계의 항구를 순방해 온 배였다. 속력과 화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나, 설계 사상이 낡아 수평 장갑, 즉 위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대한 방어가 얇다는 약점이 개장 계획서에만 십수 년째 적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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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 | [[5월 24일]] 새벽, 북쪽 길목의 짙은 안개 속에서 양측은 조우했다. 초계 순양함의 접촉 보고를 받은 기함 전대는 밤새 요격 침로를 달렸고, 05시 35분 수평선 위로 독일 함대의 마스트가 떠올랐다. 여기서 루이나 측 지휘관은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공격적인 접근을 택했다. 낙각이 큰 원거리 포격전을 피하고, 취약한 수평 장갑이 문제되지 않는 근거리 직사전으로 끌고 가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접근 침로 탓에 후부 주포탑들의 사계가 막혀, 접근이 끝날 때까지 루이나 전대는 화력의 절반만으로 싸워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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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 | 05시 52분 포문이 열렸다. 그리고 8분 뒤, 전투는 끝나 있었다. 06시 00분, 독일 전함의 다섯 번째 일제사 중 한 발이 높은 낙각으로 기함의 얇은 상갑판을 뚫고 후부 주포 탄약고에서 작렬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일치한다. 함 중앙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마스트 높이의 몇 배로 치솟았고, 4만 톤의 선체가 등뼈가 부러지듯 두 동강 나며, 뱃머리를 하늘로 쳐든 채 3분 만에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승조원 1,419명 중 구조된 것은 3명이었다. 동행하던 신예 전함도 집중 포화로 함교와 사격 통제 장치에 손상을 입고 연막 속으로 이탈했다. 독일 측 피해는 기함에 명중탄 3발. 그중 한 발이 함수 연료 탱크를 찢어 기름이 새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아침에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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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 | 소식은 그날 오전 중으로 루이나 전역에 퍼졌다. 20년간 '가라앉지 않는 배'의 대명사였던 기함이 8분 만에, 그것도 승조원 전멸에 가까운 형태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처음에 오보로 받아들였다. 방송이 사실을 확인하자 증권 시장이 얼어붙었고, 항구 도시들에서는 자발적인 조기 게양이 번졌다. 훗날 역사가들이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이라 부르게 되는 이 하루의 충격은 단순한 함정 1척의 손실이 아니었다.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 선고 이후에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화, '우리 함대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탄약고와 함께 폭발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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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 그러나 이 최악의 날은 동시에 전투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격침 보고를 받은 베렌하르트는 그날 정오, 전 함대에 평문에 가까운 짧은 전문을 타전했다. "독일 기함을 격침할 때까지 함대는 귀항하지 않는다." 통신 규범상 이례적인 이 전문은 의도된 것이었다. 적도 들으라고 보낸 선언이자, 충격에 빠진 함대와 국민을 향한 호소였다. 실제로 이 전문과 함께 랜드 내해와 대서양의 모든 가용 전력, 심지어 호송 임무 중이던 호위 전함들까지 차출되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목표물의 함교에서 뤼첸스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눈부신 전과를 안고 작전을 계속할 것인가, 새는 연료 탱크를 안고 회항할 것인가. 그의 결정과 함께, 해전사에 남을 사흘이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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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 | 173 | ===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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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 | 174 | === 뤼첸스의 최후 (1941년 5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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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 | 175 | === 잔존 함대의 항구 봉쇄와 항공 소모전 (1941년 6월~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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